태그 : 피해자

현재의 학생들에게 부치고 싶었던 편지.

Clio 님의 Cliomeida : 한 정치인과 도서관
유클리드시아 님의 : 대한민국 학생들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임쓰 님의 : 꿈을 가진 리얼리스트

현재 21살. 이제 곧 22살이 되는, 나라는 사람은 '대학생'이라는 신분 - 학력이라는 말보다는 이 나라에서는 신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만 같다 - 의 '초,중,고등생'의 문턱들을 모두 넘어온 선배격이다. 이 신분을 획득하기 위해서 내가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부터, 나를 가르치려 들었던 어른들은 '놀 시간이 있으면' 항상 공부하라고 이야기했었고, 자신들은 자식들의 공부에 소홀히 하지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집에는 온갖 물건이 쌓였더랬다. 그 당시 다섯 살이었던, 10이상의 숫자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구구단이 적혀있는 큼지막한 종이를 방문 앞에 걸어놓고 - 그것도 하루에 강제로 몇 분 이상 봐야만 놀러다닐 수 있었다. - 외우기를 시키기도 하고, 소설책이 읽고 싶은 나에게 위인전과 역사책들을 권했다. 

조금 커서 중학생이 되어서 어머니는 늘 '좋은 대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중학교' 때부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고, 아버지조차도 매일 '공부' 이외의 행동을 참 싫어했다. '공부'만을 하는 기계가 아니야 - 라고 외쳤지. 하지만 주변에서는 - 나를 가두는 갑갑한 분위기의 연속이었다. 그것들이 참 싫어서 밖으로 방황하고 학원을 빠지고 - 자랑은 아니지만, 한 달에 3일 간적도 있었다. 한달 학원비가 22만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낭비랄까. - 집에 틀어박히고, 만화책(읽고 싶었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항의 의미에서)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하지만은 나 역시도 "유클리드시아"님이 말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대학생' 신분을 가지기 위해서 내 고등학교 3년을 공부에 오로지 바쳤다. 국가적 규모의 시험인 '수능'을 보아야 했기에-. 혹은 '좋은 대학교'를 진학하기 위해서라는 그 이외의 이유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더불어 그것이 내 고등학교의 전부인 것 마냥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학적인 감성을 기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또한 예능에 대해서 흥미를 붙이는 대신 모두를 적으로 만들고 자신의 성공을 방해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인식되게끔 가르쳐주었다. 도덕과 질서를 가르치기 전부터 '경쟁'과 '승리'와 '패배'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기성세대들의 잣대에 그것들을 붙여 나의 성공 여부를 평가했다. '좋은 대학교'라는 하나의 타이틀, 그것만을 위하여 자신의 적성을 파악하고, 인성을 기를 시간마저 모두 다 '진학'을 위한 공부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10대의 모든 시기를 보낸 학생들에게 더 가혹해지고 있었다. '취업'이라는 문턱을 터무니없이 좁혀놓고서 또 터널을 통과한 - 대학이라는 입구. 그것도 좋은 대학이라는 망까지 거치면 엄청난 소수의 - 학생들에게 다시 '경쟁'할 것을 요구한다. 요구조건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수능'처럼 한가지에 목을 매면 되는 것도 아니다. '토익점수'부터 '영어회화'에 '자격증'에
'높은 대학평점'... 그렇게 점점 사회는 각박한 '공부해야만 겨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있다. '성장'하면서 교육받는 것이라고는 영어와 수학에 대한 약간의 지식들 뿐. 도덕적인, 모두와 어울릴 수 있는 공동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한 것들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이 지금에 와서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교육은 여전히 이러한 기회의 토대입니다. 그리고 그 토대를 받치고 있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여전히 책읽기입니다. 21세기 세상에서 지식은 진정으로 힘이고 교육받은 능력은 기회와 성공의 문을 여는 기술입니다. 이러한 21세기의 새벽에 우리는 부모로서, 그리고 사서로서 혹은 교육자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책읽기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주고 그것을 통해 그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 버락 오바마 -

우리는 버락 오바마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마음의 양식을 쌓을 책도 입시 후에 보라며, 대학교 졸업 후에 보라며, 차라리 입시공부를 하라고 보지 못하게 하는 나라. 그렇게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GDP 대비 공교육 정부부담 4%대에서 절대 오르지 않는 나라. 사교육비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투자하는 나라.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때까지 '명문대 진학'이라는 단 한가지 목표만을 가지고 사는 나라. 좋은 대학이 아니고서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나라. 그런 이상한 나라는 이 나라 뿐일 것이다.

교육은 '성공하기 위한 경쟁'의 수단으로 이용될 게 아니라, '공동체'에서 '어울릴 수 있는' '도덕적인 사람을'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모두가 같이 가는 것으로 해야 한다. 한가지 길에서 조금씩 낙오되면 '사회'에 '낙오'되는 것처럼 볼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다른 진로'를 같이 찾아주고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는 교육이 되어야한다. 조세희 씨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공이 아직도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말처럼, 그러한 사회가 계속해서 쳇바퀴 돌듯 유지되는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교육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그것만이 지금 같은 '대학 계급 시대'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by Nova_Mania | 2008/11/23 18:35 | 한번은, 혹은 다르게 | 트랙백

깊이. 그리고 사태의 심각성.

전경 버스가 시민을 밀었다.

현재 상황을 실시간으로 듣지는 못해도 적어도 2-3일에 한번 정도는 블로그를 통해서 이야기를 보고, 친구들에게서 듣고, 뉴스로 보고 있다. 오늘은 대충 몇명이 왔고, 점점 사람들이 늘고 있으며 분위기도 점점 바뀌어가고 있는 느낌이라고. 친구 한명은 신문을 보면서, 같은 이야기가 조금씩 긍정적인 방향이 되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곧, 희망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정말이지 '그 모두'가 각각의 다른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 뉴스도, 친구들의 이야기도, 그 이면에 대해서는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보았던, 저 위의 트랙백한 글은, 갈등이 심화될 대로 깊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하고있었다. 극한으로 치닫은 전경과의 대립. 시민들은 비폭력시위를 주장하지만, 어느새인가 -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간에 - 폭력의 구도로 치닫게 되고, 전경들은 폭행의 도를 넘어서서, 이제는 '사람'을 버스로 밀기까지 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물론 시민이든, 전경이든 그 모두가 피해자임은 분명한 일이다. 그들은 서로가 경쟁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시민의 주 공격대상은 전경이 아니라,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정부이며, 전경은 자신들의 의지 - 가 약간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어느 누군가가 자신들이 공격당하는 장소에서 남을 위해 희생하고 싶겠는가. 그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희생을. - 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명령'에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가 사실은 피해자이고, 웃고 있는 것은 저 위쪽에 있는 2MB가 아닐까)

그러나, 그들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행동도, 그 선과, 정당함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결과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 끝나야하지 않은가? 전경들, 자신도 희생자들이기 때문에 그 보복의 대상을 시민으로 돌린다는 것은, 허용할 수도 이야기거리가 될수도 없는 일임은 자명하다. '되돌릴 수 없는' 행동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그 정당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 될 수가 없다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들은 부정할 수도 있다. 시민들이 비켰어야 했는데, 그들이 비키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밀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고. 그것이 상층의 지시였다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 시민은 심하게 다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에 대한 죄는 지어버린 것이잖은가. 과연, 이 일을 가지고 '2MB' 정부나 전경측에서는 사과의 한마디를 내뱉을 수 있을 것인가. 아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구도로 가면, 정부나 전경이나 시민의 타겟이 될 수 밖에 없다. 시민으로서는, 비폭력시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밖에 없고 전경의 입장에서는 진압할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의 반복. 그러다 보면 어느새인가, 시위는 더 격렬해져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것들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지만 나도 아직은 더 생각해봐야겠다. 이런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P.s. 또 다른 이야기. 사람들은, 정말로 진심으로 자신들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듯한 느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믿을 수 없는 사실 몇 가지를 어떻게든 부정하고 바꿔나가려는 것. 그것에만 전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것만으로는 어느정도 한계에 부딛힐 수 밖에 없다. 그것만으로 세상이 바뀐다면 좋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바뀌는 세상은 바라는 것이 힘들지 않을까.

P.s 2. 아직까지도 '운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선들이 넘쳐나고,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게 될까봐 견딜 수가 없다. 부조리한 것에 싸우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한번 더 느끼고 있어야 하는데. 주변의 사람들은 그 마저도 부정한다. 결코 나서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부정한 것을 보면서도 침묵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오늘도 가슴 속에 지니고 산다.

by Nova_Mania | 2008/05/31 16:55 | 한번은, 혹은 다르게 | 트랙백 | 덧글(2)

함부로 동정해서는 안돼.

아프간 피랍사태에 대한 여러가지로 말이 많다. 사람은 소중하다-. 사람의 목숨은 철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선교원들이 돌아오는게 우선이다, 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그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블로거들이 마냥 착하기만 한 것 같다. 그들의 주장 속에는 탓해야 할 대상은 탈레반이지 기독교가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보면, 나는 굉장히 나쁜 녀석이다. 그들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내심 속으로 바란다. 여러가지 이유를 대면서 이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한다.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꼴불견일 것이다. 사람의 목숨을 너무 가볍에 여기는듯한 말투로 말을 이어가고 있으니말이다. 아니, 나는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목숨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내 대답 '사람 한명 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이다. 사람의 목숨은, 딱 그것만큼의 가치가 있을 뿐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다지만, 비교의 대상이 다르니까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지 어떤 것이 너무 무겁고 어떤 것이 너무 가벼워서가 아닌 것이다.

이미 한번의 사례를 겪었는데도 '이번 사태'에서 그런 식으로 협상에 응한다면, 그 다음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하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생명이 소중하니까? 그렇다면 만일에 교포수가 단 23명이거나 그보다 작을 때, 나는 이번 사태에 협상에 응하는 것에 찬성하겠다. 생명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23명의 목숨과 이곳저곳에 흩어져 사는 교포들의 목숨값을 비교한다면, 교포들의 목숨이 훨씬 무거운 것이다. 지금은 그들이 '피해자'의 위치에 있지만, 이번 협상이 성공하면 '교포'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된다. 그런 그들의 목숨을 23명 때문에 죽음의 경계로 내몬다니 끔찍한 생각 아닌가.

그들은 그런 식으로 현재에 애매모호한 위치에 서 있다. 단순히 '피해자'인 것만은 아닌 것이다. 어떻게 되었든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정부와 상황에 따라서 '피해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교포'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러한 위치에 있으면 '피해자'의 시선만으로 지켜볼 수만은 없다. 더 위험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사안이면, 그 전에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 23명의 목숨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교포들의 생명이다. - 국가의 위신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거야 국가 범위에서의 이야기이지 한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말이다. 국가의 위신따위가 개인에게 있어서 생명보다 소중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

애매모호한 위치에서 서 있으면, 그들은 감히 '동정'받아서는 안된다. '자신'들이 자초한 일. 그들이 단순히 '피해자'라고 한다면, 정부는 그들을 구하는 것이 맞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므로. 그런데, 정부는 과연 그 역할을 다하지 않았는가? 그렇지는 않았잖은가. 국가는 '가해자'의 입장에 서지 않기 위해 굉장히 많은 노력을 했다. 국가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출국금지라는 굉장히 강경한 수단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권리를 내팽개치고 '선교' 활동에 나섰다. 그들 스스로를 '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정화시키면서 '국가'를 '가해자'의 입장으로 내몰았다. 이런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이미 가해자다. 그러한 그들에게 함부로 동정표를 던지는 것은 자칫 가해자를 용서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교리'에는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죄를 저지른 것은 그 사람이다. 함부로 용서받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by Nova_Mania | 2007/07/23 03:48 | 한번은, 혹은 다르게 | 트랙백(1)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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