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편지
지하철에서 나오니 하늘에는 쓸데없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다지 많지는 않은 양이건만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회색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 기분마저 울적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빨리가면 나아지겠지, 라는 생각이 문득들어 지하철에서 집으로 오는 10분동안 우산을 쓰고, 조금 빠르다 싶을 정도의 속도로 집으로 향한다. 에잇, 이런 육실헐 날씨 라고 속으로 욕하며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폰을 꺼내들었다.

시간은 오전 0시 3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굉장히 늦은 시간이다. 평소때의 귀가 시간보다 두시간은 늦은 퇴근이었다. 조금만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시각에도 많은 것들은 돌아가고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갈길을 가고 있었다. 신기한 광경일 법도 했건만, 별로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그 속에서 나와 관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화려한 도시의 야경중, 내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여분 정도를 걸어와 드디어 아파트에 도착했다. 집이 보이자 단순한 안도감에서 총총걸음으로 입구에 들어서서는

"다녀왔습니다"

와 같은 쓸데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은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기한 일. 평소때와 약간은 다른 행동이었지만 보는 사람은 없었기에 한번쯤은, 하고 웃어보였다. 하고나니 그래도 뭔가 이상했다. 즐거움보다는 찝찝함만 남았다. 이럴때 반겨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웃음만이 나왔다.

흙이 묻은 신발을 털고, 우산을 접고 바지에 묻은 흙을 떼고 나서는 항상 그렇듯이, 어떤 우편이 찾아왔는지 확인해보았다. 그러고보니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편지들이 와있었다. 난데없이 온 편지들이 반갑기도 했고, 무슨 일일까, 싶어 걱정되기도 했다. 평소에 하던대로 그 편지들을 편지통에서 꺼내서 가방에 집어넣고는 엘리베이터의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는 멍하게 몇층에 있는지 쳐다본다. 4...3...2...1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들어가서 닫힘버튼을 먼저 누르며 12층을 눌렀다.

그러고보니 뭔가 오늘은 평소때와 달랐다. 이것은 기분 좋은 일? 이라고 생각하며 킬킬대고 웃었다. 누군가 봤다면 '경박'하다고 야단쳤겠지. 궁금함과는 별개로 오랜만에 편지가 왔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12층에 들어서자마자 집문을 열고 가방을 열어 편지를 꺼낸 다음, 가방을 수건으로 닦고는 옷을 벗었다. 밖에서는 몰랐었던, 너무나도 찝찝한 기분이 갑자기 몰려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비에 몇몇 곳이 질퍽질퍽하게 젖은 것, 그것 때문이리라. 얼른 샤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화장실에 들어가서 샤워기를 켰다.

몇 분이나 지난 것일까... 씻고 나오자 한결 편한 기분이 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 편지들을 확인 했다. 핸드폰 요금 청구서, 카드 청구서와 같은 것은 이제 지겨워. 그 마음가는 대로 휙하고 저 건너편으로 던져버리고, 이건 뭐야. 특별 행사전? 알바 없지. 마찬가지로 던져버리고. 남은 것은 두통의 편지. 겉면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편지가 하나. 하나는 초대장이었다. 초대장을 먼저 뜯어보았다. 어떤 내용인지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이겠지. 라고 생각한 것 그대로였다.

친구 녀석이 '결혼합니다. 와서 축복해주세요' 라고 적어놓았다. 부럽구만, 녀석. 졸업하고 거의 바로 결혼한 것이나 다름 없는 시기. 아 부럽구만~ 을 연신 남발하며 폰을 들어 '그날 꼭 맞아야된다. 내가 찾아가서 때릴거다. 결혼 축하한다'를 문자로 찍어 보내주었다. 답장은 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신나는 기분이었다.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결혼할 때가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나를 웃게 만들었다. 반면에 이제 뜯어야 할 발신자 불명의 편지에서 알게 모르게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첫사랑의 그녀일까, 아니면 내가 스쳐갔던 많은 사람들 중의 한명일까... 아, 아니야. 1주일 전에 만난 그 사람인지도 몰라. '도를 아십니까' 라는 말을 건네면서 내게 가입할 것을 추궁했던 그사람 말야. 그것도 아니면 그냥 성인 광고같은 것을 끼워놨으려나? 온갖 생각이 순식간에 교차하며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편지를 뜯어 내용을 확인한 순간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 말 한마디 외에는 다른 아무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 기억속에 있는 아버지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순전히 타인간의 삶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그와 나. 10살 이전의 나에게 있어서는 그저 나와 같이 밥을 먹고, 나와 같이 야구를 보고, 나와 같이 휴가 기간에 계곡으로 놀러갔던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 평화로움이 깨졌던 것은 11살 때로, 어느날 밤에 배가 고파요~ 라고 어머니께 전화하자, 어머니가 '내일 먹고 얼른 자렴'이라는 말만 건네고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그날 하루종일 티비를 보았고, 밤늦도록 어머니가 처음으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엄마는 죽어서 돌아오지 않을거야' 라는 말과 함께,담배를 빼꼼, 피워댔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그렇게 전화를 했는데 말이다.

그때부터 그와 나는 타인이었다.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았고 그렇게 충돌에 충돌을 거듭하다가, 결국에 완전히 타인이 된 것은 그날부터였다. 돌이킬 수 없는 책과도 같았다. 이전 페이지를 읽을 수 없는 책. 앞의 내용이 가물가물하더라도 계속해서 읽어나가야 했던 그런 책의 이야기.

어느샌가 어머니가 우리의 곁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곁으로. 하지만,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뻥긋할 뿐이었다. 벙어리가 되었다. 주위 사람들이 소근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몹쓸사람이라고 말이다. 흔들렸다. 그 말이 너무나도 사실 같았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몇번이고 부정하려 했건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매일같이 '죽었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집안일과 생계를 떠넘긴 아버지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나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한거야! 라는 마음 속의 외침에 반응했던 것일까. 도망쳐나왔다. 혼자 살기로. 그래, 어떻게 하든 그렇게 타인같은 사람들과 한시도 같이 살 수 없어. 힘들었다. 그렇게 생각해야 했던 내가, 그래서 더욱 꿋꿋이 버텨왔다. 나를 지탱해준 것은 바람도 아니고, 기쁨도 아닌, 나를 그렇게 만든 아버지였다. 증오심이 나를 이제껏 버티게 만들었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 덕택에 어두웠던 집안과 반대로 내일은 잘 풀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바뀌었다.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서 복수하겠다고. 그런데 너무나도 허무하게 게임이 끝나버렸다. 슬픈 것과 별개로 허탈했다. 한순간 아파트가 무너지는 줄 알았다. 팽그르르, 도는 내 머리 속. 그리고 어지러움. 털썩, 하고 주저앉아. 소리없이 울기만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슬펐다. 그저 울고, 또 울고 그렇게 바닥을 몇번 쳤을 뿐이었다.
by Nova_Mania | 2007/05/11 03:15 | Novel | 트랙백 | 핑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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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세이밥 at 2007/05/11 13:06
음... 힘내세요
Commented by Nova_Mania at 2007/05/11 13:45
세이밥// 나를 위한 37제 포스팅일 뿐입니다. :) 진짜 있었던 일은 아니지요.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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