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ur reality

그녀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것은 내가 알고 있는 형이 노래방에서 '그대를 그대를' 불렀을 때부터였다. 처음 그 노래가 기계에서 흘러나왔을 때에 여자 노래인데도 남자가 부른다는 신기함이 앞섰지만 - 나는 노래를 잘 못한다. 좋아라는 하지만 - 노래가 끝나고 난 뒤에는 그 멜로디가, 목소리가, 가사가 더 마음에 들어 그녀의 노래를 들어왔다. 쭈욱 들어왔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가끔씩 생각이 나면 CD를 뒤져가며 노래를 들어왔다.

나는 몇몇 가수를 제외하고서는 가요를 잘 듣지 않는다. 오히려 마이너한 인디밴드의 음악이 더 끌리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TV에서 흘러나오는 요즈음의 가요는 전자음 투성이의 아이돌 노래라는 편견 아닌 편견도 내 머리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한 편견이 사실이 아니라 편견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으 김동희의 '그대를 그대를'이었다. 조금 더 과장되게 말해서 애절하다고 말할 정도로. 그 정도로 그녀의 노래는 독특한 느낌이 있었다. 

싱글만 계속해서 내놓던 그녀가 드디어 세상에 내놓은 첫번째 앨범은 새로운 음악에 목말라 있던, 그것도 가요의 가뭄에서 날 구원해준 한 줄기의 빛과도 같았다. 보이자마자 신청하였고 결국에 렛츠리뷰에 당첨되어 받게 된 김동희 1집 'My reality'이 그 주인공.  전체적인 느낌은, 그것은 나의 현실이 아니었다. ['여자'는 그렇다.]는 류의 노래들을 남자들이 어떻게 바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것은, 그 사람의 현실. It's ur reality.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노래는 최대한 간단하게 말해서 그래도 좋다. 그녀의 노래는 그정도의 매력이 있는거다. 전체적인 곡을 소개하는 것은 이미 다른 리뷰에도 있으니 제외하고 - CD 사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주면 고맙겠지만, 아마 무리겠지... -감상평만 남기려고 한다.

1. '여자는 그래'
타이틀 곡이자 그녀의 목소리를 살리려고 한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주 멜로디는 익숙한 발라드의 그것인데 노래의 도입부가 약간 어색하다. 절제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녀 노래 전체에서 발견되는 고질적인 문제점이 이 곡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후렴구 부분에서 그녀 특유의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잘 어울린다. 오히려 저음을 더 매끄럽게 처리하고 후렴구 부분을 더 폭발적으로 불렀다면 어땠을까... 하는 느낌도 든다. 여전히 비슷한 장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한가지 아쉬운 점이지만. 노래의 느낌은 잘 살리고 있으니까 별 다섯개에 세개 반.

2. '여자여서'
차라리 이 곡이 타이틀 곡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독백과 같은 느낌으로 시작하는 노래가 조금씩 절정을 향해 달리는데 그 느낌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고 듣는 동안에 울려퍼지는 목소리는 '여자는 그래'보다 조금 더 절실한 느낌까지도 난다. 이 노래 역시 멜로디도 가사도 '여자는 그래'와 그렇게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차라리 이 노래가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차이점이 거의 없어서 별 다섯개에 세개 반.

3. '가지 말라고'
J Me의 랩으로 시작하는 노래에 묘하게 김동희의 보이스가 두드러진다. 목소리는 역시 흐느끼는 느낌이 강하지만, 그것을 조금이라도 가릴 수 있는건 J Me의 힘있는 랩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류의 노래를 들어본 경험이 거의 없기에, 뭐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여자'를 전면에 내세워서 호소하는 것보다 조금 더 공감할 수 있는 가사. 그리고 가요를 듣다가 몇 번쯤 들어본듯한 멜로디. 이전에 누군가의 그것을 엄습하는 느낌이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그녀의 목소리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별 다섯개에 네개.

by Nova_Mania | 2009/07/07 19:19 | Etc. | 트랙백 | 덧글(2)

렛츠리뷰 당첨.

김동희 1집 [My reality] 당첨됐습니다.
리뷰는 앨범 듣고, 쓰도록 할게요. 열심히 해야겠네; 끙. ㅠㅠ

by Nova_Mania | 2009/06/21 20:28 | 트랙백 | 덧글(7)

진실은 저 너머에 - 노잉(Knowing) -



50년 전에 한 학교에서 기념비적인 행사 - 50년을 보전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 을 하기 위해 전교생의 그림을 모아서 땅 속에 묻는다. 그 중에 한명의 그림이 MIT 교수인 테드 - 니콜라스 케이지 역 - 에게 넘어가고, 그가 알아낸 것은 그 숫자들이 언제, 어디에서, 몇 명이 죽게 될 것인가 하는 이른바 '죽음의 암시, 혹은 죽음의 예언장'. 아무것도 모른채로 아내를 저 세상을 보내어야 했던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신의 생각 자체를 모조리 바꿔놓는다.

'우연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숫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제외하고 짜여진 도박판처럼 너무나도 질서정연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으로서 그것을 막을 방법은 도저히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괴로워 하고 막아보려 발버둥도 쳐보지만 그저 그것은 시도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고된 결말로 치닫는 영화는 오히려 반전따위를 허락하지 않고 그대로 - 노잉, 이라는 영화제목 그대로 - 흘러간다. 지식이라는 뜻. 사물을 아는이라는 뜻. 재앙, 그리고 숫자.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기묘하고 복잡하게 얽혀있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있다는 결정론과 그 반대로 우연의 연속으로 지금의 결과가 이루어졌다는 이론들 가운데에서 이 영화는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일까.

종말 - 지구가 멸망하게 되는 - 을 맞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은 두 아이에게 여전히 남아서 인류의 세대는 계속된다는 이야기는 마치 기독교의 '노아의 방주'를 생각나게 한다.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외계인. 가능성이 없는 어른은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은 '타락한' 사람을 구원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도 이야기되며 '노아의 방주'를 준비하게 하는 '신'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환청도 어린아이에게만 들렸던 -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존재에게만 발현되는 것 - 것으로 보아 '신이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예언' 같은 분위기도 난다. 숫자가 빼곡한 종이 역시 '경고'의 의미로서 한편으로는 '예언서'에 빗대어서 이야기할 수 있다.

극중의 마지막으로 가서 '모든 인류에게 던지는 경고였던 거야'라는 말을 하며 체념하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 그곳으로 돌아가야 살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던가, 아들과 종반에 헤어지기 싫다는 부분에서 어느정도 여지는 나오지만, 어른은 데려갈 수 없다고 하는 부분 - 니콜라스 케이지의 모습에서 살 수 있다는, 혹은 이 재앙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은 있지만, 현실은 희망만으로 살 수 없다는 - 현실의 모습인 '뉴스를 아이에게 보여주지 말라'는 말에서처럼 - 것을 여과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조약돌과 어린아이. 이것들의 공통점은 여러가지 답안이 나올 수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중간지점'이 될것이다.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서 거치게 되는 공통과정. '노잉' 이라는 영화의 제목 - 모든 것이 알고 있고, 그 순서대로 흘러가는 종이. 그리고 사건들 - 과는 정반대로 그것들은 어떠한 것으로 변화될 여지 - 어떤 어른이 될지도 정해지지 않았고, 조약돌도 개울가의 돌이 되던가, 사막에서의 모래가 되던가, 정글에서의 진흙이 되던가 하는 가능성 - 가 아직 남아있다. 그럼에도 구원의 여지는 무엇일까? 에 대한 답은 영화 내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단순히 종교를 믿는 '목사'도, 종교를 믿지 않는 '과학자'도, 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던 보통의 사람도 '어른'이었기 때문에 모두 똑같은 결말을 맞게 되는 이 영화에서, 구원을 받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다 좋았지만, 하나 아쉬운 점은 바로 그것이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변화될 여지'가 있는 것에만 '구원의 여지'가 있다고 어린아이를 통해서 어렴풋이 보여주기는 하지만 보여주는 식으로 끝날 뿐이다. 구원받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는 모습은 '정답'은 정답이 될 확률이 있다는 것 뿐이다. 영화 제목 '노잉'에 전혀 반대되는 애매모호한 대답 아닌가. 진실도, 거짓도 모두 알고 있어야하는데, 그것을 보여주지 않는 것일 뿐일까. 그것은 찾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영화와 달리 우리들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구의 멸망이 단순히 사람의 '삶에 있어서 끝은 아니다'라는 극중 목사의 말처럼, 자신의 결말은 자신이 끝나지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한 상상은 그것을 꿈구는 사람의 몫이다.

by Nova_Mania | 2009/05/23 16:38 | 영화 리뷰 | 트랙백(2) | 덧글(2)

Attractive Twenties -20살, 도쿄-



20대. 청춘, 異空 - 다른 하늘, 혹은 다른 세계 - , 또 다른 시작 등등... 20살에 대하여 기성세대들이 보내는 찬사들. 참으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20대. 그들에게 늘 주어지는 수식어 - 그들의 성향을 한마디로 줄여말할 때에 - 는 도전, 패기, 좌절, 실패, 극복 혹은 새로움과 같은 단어들이다. 그 수식어들은 어찌보면 화려하다 못해 이제 20살이 되어있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도 그들이 펼치는 축제에 참가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질 때에도 있다. 그만큼 그들은 즐거움, 희열과 대리만족과 같은 감정을 여실히 펼쳐내보인다.

스무살, 도쿄에서 그런 20대들은 성향의 아우라의 정점을 찍는다. 오쿠다 히데오는 소설 '스무살, 도쿄'에서 6일간의 기록 - 20살 시작부터, 29살의 마지막까지 그 중간중간의 기록을 주인공, 히사오의 하루를 통해 보이고 있다 - 를 통해서 20대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 특유의 해학적인 문체, 혹은 사건의 전개를 통해서 단지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여주기 때문에 - 몇몇 생각하게 하는 말들도 그들 자신을 포장하기 위함에 지나지 않음을 비치면서 - 너무 많은 것을 우리에게 생각하게 한다.

밥 먹는 것보다는 음악듣기를 좋아하고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하는 주인공, 히사오가 겪는 하루, 24시간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20살이 된 히사오는 도쿄 - '스무살, 도쿄'에서 주가 되는 배경. 등장하는 공간이거나 의미가 되는 공간은 '도쿄' '나고야' '베를린'. 이 3곳 이지만, 그중에서 히사오가 사는 곳이 도쿄이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펼쳐진다. - 를 '멋진 곳'으로 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쿄'는 단순히 '번화하는 도시' 혹은 한 나라의 수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대적으로는 한창 '번창' 하고 있는 80년대의 일본이고, 거품이 빠지기 전의 화려한 일본의 모습이다. 히사오에게 있어서 '화려하고 멋진' 곳이기 때문에 자신이 LP를 통해 듣기만 하던 뮤지션들이 직접 오는 '꿈'의 장소이기도 하면서, '도쿄에 왔다는 것만'이 중요할 정도로 지나친 뜻을 두려고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고야'는 그 당시에도 여전히 시골일 뿐이며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시도하지만 결국에는 '서울'에 개최지를 내주게 되는 조그마한 도시.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가는 기성세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 '베를린'도 마찬가지로 동독과 서독이 나뉘어져 있음을, 시사하는 '폐쇄적인', '변화하지 않는' 일반적인 사회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이고 있다.

주인공이 그런 곳 - 도쿄 - 처음 상경하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집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다. 나고야와는 반대되는 분위기에서 느끼는 부러움과 '도시' 사람들에 대한 동경과 같은 감정을 애써 숨기려하지 않으며 도쿄사람이라면 아무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사 전철을 타고 친구집'으로 향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영락없는 시골 촌뜨기' 이지만, 10대가 가지고 있는 솔직함이라거나, 한 걸음씩 나아가려는 열정은 10대와 20대의 중간점에 있는 그야말로 살아숨쉬는 20살이다.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 스무 살이라는 애매한 경계선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도 누구나 그렇듯 20살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버린다. 21살이 되면서 누구나가 겪게 되는 평범한 대학생활을 하고, 그보다 2년이라는 시간 후에는 집안이 어려워 카피라이터를 하고 있는 히사오의 모습을 보여준다. '더블 판타지'에 가까웠던 80년대 일본과는 달리 거품이 빠지고 난 후의 몰락한 90년의 일본을 보여준다. 누구도 죽고, 누구도 은퇴하고... 하는 식으로 그저 가볍게 이야할 뿐이지만, 몰락한 일본의 모습을 그에 빗대어 보여주는 히데오의 모습은 주변의 환경이든, 자신의 의지이든 관계없이 현실에 조금씩 적응하게 되고 나이를 먹은 기성세대 누구나가 하는 것 처럼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짝을 택할 정도로 20살에 가졌던 생각과는 너무나도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처음에 하겠다던 음악 관련 일을 하겠다는 포부도 '오랜만에 남들에게 이야기 할 정도로' 부끄러운 것이 되었으며 현실은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에 가서 20대이기 때문에 늘 지닐 수 있는 '방황'과 '실패'에 대하여 박수와 찬가를 아끼지 않는다. '배고프다'는 것은 모자라다는 것이고, '학생처럼 철없었다'는 것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더 할 수 있는, 꿈을 향해 날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젊다는 것은 특권이다. 실패해도 된다는 특권이다' 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 -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꿈을 향해서 달려 갈 수 있다는 - 을 할 수 있다는 것은, 20대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청춘은 결코 머무르지 않고 점점 담배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지게 되니까 말이다. 계속 '20대'이고 싶었던 30대는, 다시 20대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까 사람이 결국에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청춘을 무엇인가로 바꾸어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실패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었다면, 그것으로 브라보. 그렇지 않았더라도 20대라면 브라보.


이글루스 가든 - 천 권의 책읽기

by Nova_Mania | 2009/05/12 18:57 | Novel | 트랙백 | 덧글(4)

체벌이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

때린다-, 는 행위는 너무나도 비인간적이다-. 라는 이야기를 예전 - 2006, 2007년에 한번씩 - 블로그에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체대'에 현존하는 폭력문화에 대해서 언급한 글 - 이글루스 블로그는 왠만하면 접하고 싶지 않아서 아예 글을 가지고 왔다. 2007년 작성 - 이었지만 이번에는 체육대학이라는 단순한 범위를 넘어선 일반적인 사립형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문제라는 것에 또 한번 놀랐다. 발바닥을 110대 맞은 고등학생이 자살하는 사건. 더욱이 놀란 것은, 이것이 심각한 체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참 슬프지 아니한가. 2006년으로부터 4년째, 2007년으로부터 3년째에 해당하는 이 시간동안, 그러한 사소한 문제 하나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 또한 여전히 그러한 체벌이 일반화 되어있다는 것이.

밑의 글에서 다룬 한겨레 특집 '폭력문화, 이대로 괜찮은가?' 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이 지금에서 사람들에게 전혀 자극적이지 않다는 것은,우리 모두가 이러한 것에 길들여졌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도 체벌은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그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담을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익숙해졌다는 것 아닐까. '폭력의 일상화' 이 짧은 두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는 참으로 많은듯 하다. '폭력'은 단순히 나누자면 두가지가 있겠다. '구타' 혹은 '가혹행위' 전자는 육체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고 후자는 육체적, 정신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일까?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 한가지를 꼽자면 '의견소통'의 불일치로 해석할 수 있다. 충분히 말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쌍방향'적인 의사소통의 실패로 인해 폭력을 야기하는 경우가 있으며, 그게 아니라면 말도 안되는 의견을 피력하고, 그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상대를 힘으로 굴복시키는 경우도 있다. 어찌됐든 두 가지가 '단일방향'으로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대화의 기술이 부족했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고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닌데 너무 간단한 해결방법을 택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또 다른 이유라면 '폭력'의 세습화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 행한 것을 학습하는 데에는 별다른 의문점을 가질 새가 없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너무 확고하게 나와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이니까, '이렇게' 하면 된다는 생각. 어찌보면 첫번째 이유보다도 더 무서운 것일테지만, 보통 가지고 있는 생각은 후자에 덜 부정적이다. 사람들은 단순하게도 '맞은 사람'은 '맞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어느정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은, 그러한 폭력이 정당화될 수있는가? 하는 것이다. 얼핏보면 가능한 것도 같다. 폭력으로 상대를 누르는 것이 가장 쉬운 굴복방법이기 때문이다. 당장에 드러나는 성과를 보여주기 때문에, 그것이 합리화될 수도 있을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폭력으로 길들여진다는 이야기는 거짓이다. 그것은 오히려 반발심을 사게 될 확률이 높다. 이번 사건에서 고등학생이 자살한 것도 그의 연장선에서 해석할 수 있다. 고등학생이 알고 있는 '생명의 중요성'에 대한 반발. 혹은 '기존'의 틀에 대한 반발심으로 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식의 반발이 당장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그 아이들이 크면 '보복심리'의 작용, 혹은 어렸을 때의 자신들이 굴복하였을 때에 경험을 토대로 '효율적인 방법'으로 인식하고 폭력을 휘두를 가능성이 크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따져보자면 피해의식을 잠재의식으로 가지고 있는 아이는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말은 결코 잘못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대화의 기술을 통해서 내면에 있는 자발성을, 혹은 복종심을 이끄는 것은 사람 대 사람의 의사소통에서 정녕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우리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대화와 사랑 - 아가페적인 - 으로 누군가의 자발성, 혹은 '쌍방향'의 의사소통을 이끌어내는 경우가 뉴스에 올라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아직도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불행하게도 정확한 방법 같은건 존재하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이에 대한 처벌을 시작하면 체벌과 가혹행위와 같은 행위는 오히려 은밀하게 행해질 가능성이 높다. 단기간에 바꾸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지능적으로 행해질 경우도 고려해야한다. 단 한가지 방법은 '자발적'으로 바뀌기를 호소하고, '폭력'의 정당성 같은 것은 없다고 교육해야 한다. 폭력에 익숙해진 아이들을 회복시킬 방법으로 회복기관과 같은 시설을 확장하여 운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도 되겠지만, 임시방편이다. 결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스스로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그것을 버릴 때까지 '가르치고' 또 가르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p.s 추가적인 의견이나 반대의견은 트랙백, 혹은 댓글로 써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

by Nova_Mania | 2009/05/03 14:05 | Adventure for dream | 트랙백 | 덧글(2)

그래도 그들에게 동정표는 조금,

흔히 주변에서 롯데제과와 오리온, 해태제과와 크라운을 두고 4대 제과업체라고 이야기한다. 이유인 즉슨, 유통되는 과자의 양을 보면 그 4개의 업체가 거의 모든 시장을 쥐고 있다. 그 와중에도 롯데의 경우에는 나머지 세 회사의 매출에 맞먹는 수익을 거둘정도. 이는 사실상 과점을 넘어서 거의 독점에 가까울 정도로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1강 3중이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제과시장.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제과업체쪽은 가격인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평균 물가 인상률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 가장 많이 오른 아이스크림의 경우에는 단 3년동안 2배가 넘게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의 가격인상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정도가 너무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가. 가장 쉬운 예를 들자면 월드콘과 같은 상품이 있을 것이다. 2006년도에 700원 하던 아이스크림이 단 4년 사이에 110%에 가까운 가격상승이 있었다. 2006년 2.2% 2007년 2.6%와 같은 평균물가 상승률에 비교해보면 터무니 없는 수치 - 물론 2008년의 물가상승률의 경우에는 전년도 보다 더 오르긴 했다. - 이다. 소비자를 거의 우롱하다시피 하는 가격상승. 가격이 오르는 이유에 대해서 해명하려 하지도 않고, 중간에 소비자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유예기간을 두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회사측의 일방적인 통보, 혹은 일방적인 가격상승 - 가격인상 통보조차 없이 상승한 과자 - 에 의해서 오르게 된 과자들의 가격에 '비싸다' '비싸다' 하면서도 소비자들은 그 과자들을 사서 먹을 수 밖에  없었다. 4대 제과업체가 시장 전체를 쥐다시피 하고 있었기에, 선택권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정답 -  경쟁 업체가 이보다 더 많았더라면, 이렇게 일방적인 통보로 인한 가격상승에 불필요하게 피해를 입어야했을까 - 일 것이다. 그렇게 몇 년간 소비자를 계속해서 우롱하던 제과업체들이
이번에는 그보다 더 치사한 방법으로 가격을 올렸다. 가격상승이 아닌, 용량 축소로. '롯데제과'에서 용량축소로 얻게 되는 실질적인 가격상승률은, 4~17%에 이르기까지 참 다양하다. 이전에 행하던 가격인상으로 인해 받았던 비판과 질타들을 이기지 못한 탓일까. 그게 아니라면 가격 인상으로 받을 수 있는 이익의 탄력에 한계가 온 것일까.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제과업체들에게 왜 이런 식으로 가격을 올려야 했나?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다. 왜 그랬을까?

롯데제과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에서 '아지기'님이 밝히고 있는 '영업이익'의 감소폭 증가도 한가지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감소폭의 증가는 원자재의 가격상승이 주된 요인이다. 혹은 전체적인 물가 상승폭으로 인한 임금률의 상승도 한가지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제품가격 상승의 요인들을 분석하면 한가지가 아닌, 여러가지의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서 롯데제과가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간단한 오산이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롯데제과가 얼마를 올렸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식으로 올려야 했나?' 하는가격을 올린 방식이 잘못된 것이다.

모두가 자신들이 피해입는 것에 대해서 알 권리가 있다. 이는 '소비'에서도 마찬가지로서 같은 물건을 가격을 더 주고 사야만 한다면, 그것도 마찬가지로 소비자들에게 있어서 엄연한 권리침해, 혹은 피해로 인식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업체에서는 미리 가격인상, 혹은 용량 축소와 같은 부분에 있어서 모두에게 통보해주고 협조를 얻은 후에 가격을 인상시켜야만 무리가 없지 않나, 언제까지 '싫으면 먹지 마라' 하는 태도로 일관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는 소비자들. 그런 식의 제과업체들의 가격인상이 너무 잦다고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물가가 상승하면 가격을 즉각 올려버리지만 하락한다고 해서 그들이 물가하락으로 인해... 라고 이야기하면서 가격을 내린 경우 - 휘발유나 경유처럼 원유 가격을 따라서 오르고 내리고 하는 - 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만 반영하기에 제조가격을 포함한 기타 부분에서 생산가격이 하락하는 경우에는 차익 - 판매가격(상승 전 원가+인상된 가격) - 생산가격 - , 그것을 고스란히 영업이익으로 챙기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물가하락으로 거둬들인 이익의 양이 감소하거나, 혹은 원자재의 가격 상승, 임금률 상승 등의 여러 요인에 의해서 영업이익이 줄어들게 되면 또 다시 가격을 올리고. 그러한 악순환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그러다가 가격에 의한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 또 이러한 방법으로 가격을 상승시킬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기업의 경영방침'이 옳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추구하는 방향 - 이익에 관한 부분 - 에서는 옳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따졌을 때에 그러한 영업방침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회사가 이익집단인 것은 사실이다. 모든 지출을 보상하는 이윤이 없다면 회사는 운영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이익을 부당한 방법 - 독ㆍ과점에 의한 이익 혹은 담합에 의한 이익. 그것도 아니면 소비자를 우롱하면서 챙기는 이익 - 으로 얻으려고 할 때에 이윤집단이 추구하는 방향이기 때문에 옳다고 하는 것은 절대 옳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롯데의 경우에도 결코 열외는 아니다. 정당한 이윤이 아닌 이상, 소비자들에 의해서 질타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자신들이 했던 일이, 기업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by Nova_Mania | 2009/05/02 16:43 | Adventure for dream | 트랙백

옥스퍼드 영한사전. 까먹고 있었다!!!

네. 리뷰입니다. 옥스퍼드 사전이 당첨됐는데 솔직히 너무 오래 잊고 살았네요. -_-; 사진이 없어서 너무 썰렁한 리뷰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사진 찍을 수 있을 도구가 여기에 없는지라(...) 군대 내란 다 그런 것이죠 뭐. 일단 처음에 겉을 보면 옥스퍼드 사전이 항상 그렇듯이 꽤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예전 고등학교 때와 사실 다를 것 없는 이미지이긴 하지만(...) 그것이 옥스퍼드 사전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_-;

우선 넘어가면 사전의 형태는 이전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용빈도나 중요도에 따라서 강조되어 있다던가, 단어와 예문을 알기 쉽게 색으로 구분했다던가 하는 부분은 세심하지만, 정말 중요한 배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끼어있는 예문도, 그다지 어려운 형태가 아닙니다. 토익 공부를 한다던가, 수능 공부를 하기에도 꽤나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느낌이랄까요. 가격은 조금 비싼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전을 산다고 해서 후회한다던가 할 일은 그다지 없을 것 같아요. 그런 것 치고는 수험생이 쓰기에 꽤 편한 사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두꺼운데, 은근히 가벼워요!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ㅇ>-< 예전처럼, 종이사전이 정말 유용해지는 시기는 아니지만 - 전자사전에 비하면 상당히 공부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지요 - 종이사전만이 가질 수 있는 그 특유의 느낌은 정말 비교할 수 없는 그런 게 있죠(말하지 않아도 아실 거라고 생각하고 싶...)

그런 의미에서, 다들 한번쯤 이 사전이 아니더라도 종이사전으로 한번쯤 그 예전의 기분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
렛츠리뷰

by Nova_Mania | 2009/03/23 19:38 | 책 리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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